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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4 18:41

초/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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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를 좋아한다. 향초가 진열된 가게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 향기에 흠뻑 젖은 다음에야 나온다. 향초를 얻으면 그지없이 행복하다. 초에서 풀려나오는 향내음을 음미하노라면 칙칙한 일상이 일시에 밝고 낭만적인 예술로 바뀐다.


집에 여러 종류의 향초가 있다. 분위기와 용도에 따라 향초를 켠다. 가장 선호하는 향은 ‘Quiet moment’ 라는 부제가 달린 명상용 향이다. 마음이 고요할 때는 영감을, 어지러울 때는 평안을 얻는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초는 자신의 존재감을 넉넉히 드러낸다.


향초는 내게 일상의 필수품목이기도 하다. 요리할 때 촛불을 켠다. 음식 재료를 스토브에 올리기 전, 부엌, 거실, 식탁,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위에 초를 밝힌다. 기계음을 유난히 싫어해서 요란한 환풍기 소리를 들으며 요리를 하노라면 정신이 산만해지는 나는 냄새를 없애는 비결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아무리 진한 요리를 할지라도 촛불을 30분 정도 켜두면 집안 구석구석까지 은은한 향으로 바뀐다.


초는 손님맞이에도 빠질 수 없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킨다 해도 그 집안 특유의 냄새를 없애기는 쉽지 않다. 초는 이러한 고충을 단번에 해결해준다. 인간은 보통 시각보다 후각에 예민하고 후각이 만족하면 매사를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법, 향초는 방문객의 마음을 너그럽고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일등 공신이다.


버석한 날씨에 뼛속까지 말릴 것 같은 뙤약볕을 뚫고 집안에 들어오면 초를 켜고 싶다. 비가 그리워서다. 아니다. 한여름 대낮에 촛불을 밝히고 캘리포니아의 귀한 비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향초를 밝힌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과거에 맡았던 그리운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고통과 질곡의 시간도 향초에서 스며 나오는 냄새와 섞여 달콤한 추억이 된다. 비오는 날 너울대는 촛불을 바라보노라면 살면서 잠시 흔들리는 일도 괜찮다고 느낀다. 흔들려도 여전히 아름다운 저 촛불처럼 아직은 살아있음에 삶의 희열조차 맛본다.


촛불과 잘 어울리는 것이 녹차다. 큰 머그잔에 진하게 우려낸 녹차를 담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가에 앉으면 세상 살맛이 더 없이 증가한다. 이때는 꽃향을 고른다. 여러 종류의 꽃들을 섞어놓은 것보다는 단독 꽃향을 좋아한다. 클래식 음악을 곁들인 호사라니.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모든 악기가 다 좋다. 관현악이나 오케스트라보다는 싱글 악기음악이 좋다. 향초를 켜면 쇼팽이랑 차이콥스키랑 모차르트를 만나는 기쁨이 배가된다.


예수님을 초에 흔히 비유한다. 자기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희생을 말한다. 예수님은 초에 비유할 수 없는 존재이시다. 크신 그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희생의 개념을 뛰어넘는 분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죽은 것은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이이다. 대부분의 종교와 신화는 변덕스런 신들의 심기를 달래기 위하여 인간을 산 제물로 바쳤다고 증언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 그대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분의 희생의 가치와 깊이를 알아가는 정도와 비례하여 우리의 신앙도 자랄 것이다.


향초가 탄다. 주님의 사랑이 그 촛불 위에서 너울거린다. 주님의 사랑을 덧입으면 향기가 날까. 나는 이 촛불만큼이나마 주변을 덥히고 정화시키고 있는지 문득 뒤를 돌아본다.


주님이 유난히 그리운 이 아침, 향초를 켠다.


교회지남 2014년 10월호 연재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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