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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6 23:36

밥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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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력솥에서 하얀 김이 치솟는다. 밥내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냄새.


나란히 나란히 누워있는 앙증맞은 밥알들. 햇빛과 물과 농부의 마음이 빚어낸 알갱이들의 마스터피스. 고슬고슬한 밥을 주걱으로 살살 걷어 입으로 가져간다. 잊었던 향기가 입안에 차오른다. 고국의 밥향. 혀끝으로 지난 시간을 음미하며 밥을 먹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하얀 쌀밥을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외할머니는 웬일인지 내가 들를 때마다 쌀밥을 새로 지어주시곤 했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고봉밥은 한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친 양이었다. 수저를 내려놓으면 외할머니는 남은 밥에 물을 퍽! 순식간에 부으셨다. “물에 만 밥은 남기는 거 아니다. 다른 사람이 먹지 못하니까.” 하셨다. 도리질 하고 물러나면 이 문둥아 다 먹여야 혀. 밥이 얼매나 귀한 건데.”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외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왜정 때였지. 산달이라 배가 불렀는데 하얀 이밥이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거라. 어느 저녁에 옆집 할매가 하얀 쌀밥 한 공기를 담 위로 넘겨주었어. 식구들한테 들킬세라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퍼서 뚝딱 먹어치웠지. 그렇게 달고 맛있는 밥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단다.” 외할머니가 내게 항상 따끈한 흰쌀밥을 지어주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골에서 보리밥을 먹고 자랐다. 할머니는 쌀 한주먹을 따로 씻어서 무쇠 솥에 미리 앉혀놓은 보리쌀 한가운데를 헤치고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그 쌀은 딱 밥 한그릇 양이었다. 할머니는 그 쌀밥을 퍼서 외동아들 아버지 밥상위에 올리셨다. 아버지는 늘 밥을 남기셨다. 동생과 나는 그 밥을 나눠 먹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밥알을 세어가며 천천히 먹고 싶은 밥. 그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랑 영원히 함께 살고 싶었다.


그런 맘을 어찌 아셨을까. 내가 청소년일 때 아버지는 늘 말씀하시곤 했다. “딸아, 이 아빠가 평생 먹여줄 테니 시집가지 말고 나랑 살자.” 세상물정에 유난히 어두운 딸을 염려하신다는 생각보다는 평생 밥을 먹여주시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던지.


2012년에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떠나오던 날, 축제가 벌어졌다. 커다란 밥솥에 하얀 쌀밥이 가득했다. 옆사람이 다 먹지 말고 남기세요.” 나직이 말하더니 고개로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린 눈동자 수십 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미 한참이나 먹어버린 참이라 무척 미안하고 속상했다.


태평양을 건너와서 살아온 세월이 생의 절반을 넘겼다. 1980년대 중반에 미국에 도착하니 쌀이 지천으로 넘쳤다. 한인마켓에서 30달러어치 물건을 사면 20 파운드짜리 쌀 한 포대를 선물로 주었다. 어느 때는 서너 포대를 얻어왔다. 그 쌀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할머니의 물밥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남긴 고슬 밥이 아직도 그립다.


할머니의 물밥 심으로 살았다. 할머니의 물밥은,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그 밥은, 그러니까 오직 한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밥이고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고슬밥 힘으로도 살았다. 아버지는 남긴 밥만큼 배가 고프셨을 것이다. 철없는 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아버지의 밥을 먹었다.


삶이 힘들 때마다 외할머니의 물밥과 아버지의 고슬밥을 생각한다. 외할머니의 물밥과 아버지의 고슬밥을 먹고 자란 나는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분들이 내게 주신 사랑값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예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산다. 예수님이 대신 치러주신 생명값으로 산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교회 지남 12월호 연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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