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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기싸움이라도 벌이듯. 275문제라 했다. 4시간이 주어졌으니 한 문제당 일분이 조금 모자라는 시간이 배당된 셈이다.


간호사 자격시험. 컴퓨터 시험에 대한 공포스런 루머가 대단했다. 75문제가 리트머스 시약이다, 최고난도 문제들인데 잘 하면 컴이 저절로 꺼진다,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청신호다, 너무 못해도 75문제에서 꺼진다, 가망이 없다는 심판이다, 수험자의 실력이 어중간해서 판단이 유보되면 100문제까지 간다, 그 뒤에는 275문제를 다 풀어야 한다...


75문항에서 끝장을 보아야 했다. 시력이 약한 나는 2시간 이상 컴에 집중할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오래 컴을 들여다보면 글자가 흐려지고 깨지면서 판독이 어려운 상태가 되곤 했다.


긴 숨을 내려쉬고 클릭을 시작했다. 시험 치르는 요령을 자세히 읽었다. 연습문제도 충분히 시간을 들여 풀었다. 이미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괜찮아, 75문제에서 끝을 낼 것이니까. 시간은 충분해.


75번 문제에 답을 하는 손가락이 떨렸다. 컴아, 제발 꺼져다오. 내 눈은 이미 지쳤단다. 웬걸, 76번 문제가 화면에 팍, 떠올랐다. 바짝 긴장이 되었다. 100번 문항에 희망을 걸었건만 답을 클릭하자마자 101번 문제가 화면에 나타났다. 맙소사. 이를 어쩐담. 입술이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시험문제를 꼼짝없이 치러야 한다.


눈길 손길을 바삐 움직였다. 생각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일 분 안에 3문제를 풀어야 한다. 재빨리 읽고 느낌이 오는 답을 찍었다. 시간부족으로 문제를 읽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것은 억울한 일. 문항마다 함정이 깔려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속을 수밖에 없도록 꼬이고 꼬여있었다.


112번 문제에 답을 한 직후였다. 컴 화면이 퍽! 꺼져버렸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캄캄한 화면. 이리저리 마우스를 움직여도 스크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당했다. 75, 100번도 아니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세차게 때렸다. I am failed! 나는 망했다!


파킹랏에는 햇살이 눈부셨다. 자동차 안에 들어서니 눈물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나는 간호학 공부를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필수교양과목을 마치는데 꼬박 2년 반이 걸렸다. 철학, 심리학, 영양학은 흥미로웠다. 생리학, 미생물학, 대학 영어는 책장마다 눈물로 얼룩졌다. 본과에 들어가 2년을 더 공부했다.


간호학과는 지옥의 불꽃이라는 정평이 나있었다. 50년 학과 전통과 프라이드를 망칠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찬 교수들은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낙제시킬까, 연구에 주력한 사람들 같았다. 필수 과목에 A 학점을 맞고 선발된 학생들이지만 무척 고전했다. 2주마다 치르는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두통과 복통을 앓았다. 낙제한 학생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일 년 후에는 절반이 떨어져나가고 졸업 즈음에는 교실이 썰렁했다.


숙제가 엄청났다. 학과 공부이외에 실험, 리서치 페이퍼 작성, 세미나 연구 발표, 실습 비디오 제작은 시간을 거침없이 먹어치우는 주범들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있는 환자실습은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병동에서 무작위로 쏘아대는 교수의 질문에 조금만 어물거려도 당장 집으로 쫓겨 가야 했다. 모든 제출물은 조금만 타이핑 규격에 어긋나도 영점 처리가 되고 두 번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스터디 그룹에서 함께 공부했던 마리아는 남편과 이혼을 했다. 학교를 마칠 즈음에는 동기 중에 3명이 이혼을 하고 2명이 별거에 들어갔다. 가족의 이해와 협조가 없으면 도무지 해낼 수 있는 공부가 아니었다.


질리게 공부했다. 주중에는 학교 일정을 마치고 도서관에 가서 밤 9시 반에 문 닫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나왔다. 주말에는 잭 인 더 박스 Jack in the Box 햄버거숍에서 밤 11시까지 공부했다. 제인 인 더 박스 Jane in the Box였다. 모든 인생의 재미는 유보되었다. 꼭 필요한 일만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글쓰기였다. 일간지에 매 2주마다 칼럼을 쓰고 본국과 로컬 문예지에 열심히 글을 발표했다. 공부하는 동안 수필집 두권을 출간했다. 오직 공부와 글쓰기만 했다. 그렇게 공부한 간호학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교수님들이 그렇게 까탈을 부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람의 몸을 만지는 것은 하늘을 만지는 것이라는 진리 하나를 깨닫게 하려고 그토록 애를 썼다는 것을. 지식이 아니라 인내와 사명의식을 시험하신 것임을.


고등학교 3학년 때 육군간호장교사관학교에 응시했다. 필기시험에는 합격했는데 2차 면접과 3차 보안검사에서 낙방했다. 면접관은 내게 군인의 소양이 부족해 보인다고 했다. 18세에 가졌던 간호사의 꿈이 20년 후에도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6개월 후에나 재시험 자격이 주어진다. 그도 낙방하면 학교에 들어가 다시 공부해야 한다. 기가 막혔다. 차속에서 2시간 동안 울고났더니 그나마 속이 후련했다. 다음번에는 철저히 준비하자.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데 당연히 더 공부해야지. 훌훌 털고 집으로 돌아왔다.

 

3일 동안 잠만 잤다. 결과는 사흘 후에 발표된다 했다. 합격하면 캘리포니아 라이선스 번호가 이름과 함께 뜬다 했다. 결과를 알아볼 필요조차 없었다. 떨어진 게 분명하니까. 그래도 사흘째 되는 날 인터넷에 들어가 내 수험 번호를 찍어보았다. 허사였다. 6일째 인터넷을 열어보아도 허탕. 나는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8일 째 되는 날 새벽, 컴을 열었다. 당락은 5일 전에 이미 결정되었는데. 공부한 것이 아까웠던 것일까. 허망했나. 미련이 남았던가. 그런데 오 마이, 내 이름이 라이선스 번호와 함께 나란히 찍혀있었다. 가주간호협회에 전화를 하니 사무실 이전으로 그 기간 동안 시험을 치른 사람들의 결과발표가 늦어졌단다.


이렇게 나는 간호사가 되었다.

(그린에세이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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